자료실2009. 02. 14
[아름다운여행] 불가촉천민의 아버지 '암베드카르'
[아름다운여행] 불가촉천민의 아버지 '암베드카르'
[img:h5.jpg,align=,width=150,height=215,vspace=0,hspace=0,border=1]
“우리가 고양이나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고 먹을 물을 구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이 땅을 나의 조국이라고 부르고
이 종교를 나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보통 우리가 ‘인도’하면 떠올리는 사람은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빈자의 성녀 테레사 수녀,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우리나라에게 ‘동방의 등불’이라는 멋진 시를 안겨준 시성 타고르 등이다.
그런데,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으로 구성된다. 그러면 말 그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의미의 ‘불가촉천민’은 어디에 포함될까? 그들은 카스트에도 들 수 없는, 그 바깥의 존재들이다.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천시 받는 사람들인 이 ‘불가촉천민’들은 누구를 그들의 대표자로 생각할까? 아마도 인도 ‘불가촉천민의 해방자’이자, 독립 인도의 네루 내각의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서 ‘인도헌법의 건축자’로 불리며, 동시에 ‘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로서 인도 인민의 가슴에 깊이 박혀 숭앙을 받고 있다는 브힘 라오 람지 암베르카르(Bhim Rao Ambedkar, 1891-1956)박사일 것이다.
자신이 불가촉천민 출신으로서 당대의 수많은 멸시와 고초를 몸소 겪으며 자랐던 암베드카르는 바로다의 지방장관의 도움으로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에 유학하여 존 듀이의 지도와 영향 하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 영국으로 건너가 다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변호사 자격을 얻고,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불가촉천민 해방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초다르 저수지’사건이었다. 1923년, 봄베이 입법 의회는 당시의 저명한 사회개혁자 볼레의 제안에 따라 불가촉천민들에게도 급수시설, 우물, 학교, 병원 등 모든 공공시설의 이용을 허락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리고 이 법에 따라, 마하드 시에서는 1924년에 ‘초다르 저수지’의 식수 사용을 불가촉천민에게 개방하였다. 하지만 상위 카스트 주민들은 불가촉천민들이 ‘초다르 저수지’에서 물을 떠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암베드카르는 그를 따르는 만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초다르 저수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천명하기 위한 대중 집회를 열고 ‘초다르 저수지’로 행진해 가서 그 ‘금지된 저수지’에서 물을 떠 마심으로서 고난받는 민중들의 권리를 온 천하에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상위 카스트들을 흥분시켰고, 그들은 심지어 무방비상태의 대회 참가자들에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기까지 했다. 또한 이러한 상위 카스트들의 반발에 의해 마하드 시에서는 ‘초다르 저수지’를 불가촉천민에게 개방키로 했던 당초의 결정을 1927년 8월 4일에 철회하였다. 하지만 그런 여러 가지 억압 속에서도 암베드카르와 불가촉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꺽이지 않았고 이러한 불가촉천민들의 요구는 오랜 기간의 법정싸움 끝에 1937년 봄베이 법정으로부터 마침내 승인되기에 이르렀다.
[img:h4.jpg,align=,width=145,height=210,vspace=0,hspace=0,border=1]
그 후로도 암베드카르는 전 생을 통해서 불가촉천민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암베드카르가 간디와 대립했다는 것이다. 간디와 암베드카르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개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불가촉천민 문제를 둘러싼 이념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불가촉천민들은 인간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아래 있는 무엇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가장 비천하다고 여기는 직업에 종사해왔다. 오물 수거, 시체 처리, 가죽 가공, 세탁, 도기 제조 등이 주로 그들의 몫이었다. 상위카스트들은 그들과 접촉하거나 심지어는 그림자가 스치기만 해도 오염된다고 생각했다. 일부 남부지방에서는 그들을 보기만 해도 오염된다고 생각했기에 불가촉천민은 밤에만 활동해야 했다. 또한 그들에겐 사원 출입이 금지되고, 마을 공동우물의 물을 긷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신발을 신을 수도 없었고, 버스나 기차에 빈자리가 있어도 앉을 수 없었다. 이러한 극단적 차별을 철폐해야만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암베드카르와 간디가 모두 동의하였으나, 암베드카르가 이러한 차별을 낳는 카스트제도를 철폐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간디는 카스트제도가 인도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에 카스트제도 내에서 상위 카스트가 하위 카스트에게 자비를 베품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간디는 “밥벌이를 하는 방법에 관한 한, 자신이 속한 계급의 직종을 따라야 한다. 이는 조상 대대로 물려 오는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암베드카르에게는 조상이 물려 준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적으로 부당한 것이었다. 그럴 경우에는 각자 자신의 능력에 맞고 좀더 많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처음부터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불가촉천민들은 간디가 그들에게 붙여준 신의 자녀라는 의미의 ‘하리잔’(Harijan)이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핍박받는 자라는 뜻의 ‘달리트’(dalit)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달리트’는 불가촉천민의 대표적 명칭이 되었다. 위대한 영혼 간디 역시도 자신의 계급성을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일까?
결국 공공시설의 이용은 물론이고 최하층민을 위한 의석 및 공직 할당 제도까지 암베드카르의 영향으로 불가촉천민의 인권이 크게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도 불가촉천민들에 대한 차별이 생활 곳곳에서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불가촉천민들은 아무리 인도 법률이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고 불가촉천민 제도가 불법임을 언급하더라도 상위 카스트들의 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힌두교를 버리는 것만이 자신들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고는 개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개종의 시작은 1956년 암베드카르가 20만명의 불가촉천민들을 이끌고 불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로의 개종이 가장 많은데, 그것은 인도에서 일어난 종교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보다 거부감이 작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종이 잦아지자 남인도의 Tamil Nadu주를 비롯하여 Madhya Pradesh, Orissa, Arunachal Pradesh, Gujarat주에서는 개종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해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이것은 상위카스트들이 불가촉천민들을 자신들의 사회 속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 그들이 힌두교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 법안은 형식적으로는 강제적이거나, 사기성이 있거나, 정당하지 않은 동기 때문에 개종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밝혔으나 많은 사람들은 기준의 애매모호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경찰 또한 모든 개종행사를 봉쇄하고, 이슬람 율법학자인 몰비들이 지역 당국에 통고 없이 주민들을 개종시키면 구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많은 수의 불가촉천민들이 힌두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고 만약 개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존엄성을 줄 수 있다면 감옥에 가더라도 개종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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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양이나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고 먹을 물을 구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이 땅을 나의 조국이라고 부르고
이 종교를 나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보통 우리가 ‘인도’하면 떠올리는 사람은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빈자의 성녀 테레사 수녀,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우리나라에게 ‘동방의 등불’이라는 멋진 시를 안겨준 시성 타고르 등이다.
그런데,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으로 구성된다. 그러면 말 그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의미의 ‘불가촉천민’은 어디에 포함될까? 그들은 카스트에도 들 수 없는, 그 바깥의 존재들이다.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천시 받는 사람들인 이 ‘불가촉천민’들은 누구를 그들의 대표자로 생각할까? 아마도 인도 ‘불가촉천민의 해방자’이자, 독립 인도의 네루 내각의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서 ‘인도헌법의 건축자’로 불리며, 동시에 ‘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로서 인도 인민의 가슴에 깊이 박혀 숭앙을 받고 있다는 브힘 라오 람지 암베르카르(Bhim Rao Ambedkar, 1891-1956)박사일 것이다.
자신이 불가촉천민 출신으로서 당대의 수많은 멸시와 고초를 몸소 겪으며 자랐던 암베드카르는 바로다의 지방장관의 도움으로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에 유학하여 존 듀이의 지도와 영향 하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 영국으로 건너가 다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변호사 자격을 얻고,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불가촉천민 해방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초다르 저수지’사건이었다. 1923년, 봄베이 입법 의회는 당시의 저명한 사회개혁자 볼레의 제안에 따라 불가촉천민들에게도 급수시설, 우물, 학교, 병원 등 모든 공공시설의 이용을 허락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리고 이 법에 따라, 마하드 시에서는 1924년에 ‘초다르 저수지’의 식수 사용을 불가촉천민에게 개방하였다. 하지만 상위 카스트 주민들은 불가촉천민들이 ‘초다르 저수지’에서 물을 떠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암베드카르는 그를 따르는 만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초다르 저수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천명하기 위한 대중 집회를 열고 ‘초다르 저수지’로 행진해 가서 그 ‘금지된 저수지’에서 물을 떠 마심으로서 고난받는 민중들의 권리를 온 천하에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상위 카스트들을 흥분시켰고, 그들은 심지어 무방비상태의 대회 참가자들에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기까지 했다. 또한 이러한 상위 카스트들의 반발에 의해 마하드 시에서는 ‘초다르 저수지’를 불가촉천민에게 개방키로 했던 당초의 결정을 1927년 8월 4일에 철회하였다. 하지만 그런 여러 가지 억압 속에서도 암베드카르와 불가촉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꺽이지 않았고 이러한 불가촉천민들의 요구는 오랜 기간의 법정싸움 끝에 1937년 봄베이 법정으로부터 마침내 승인되기에 이르렀다.
[img:h4.jpg,align=,width=145,height=210,vspace=0,hspace=0,border=1]
그 후로도 암베드카르는 전 생을 통해서 불가촉천민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암베드카르가 간디와 대립했다는 것이다. 간디와 암베드카르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개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불가촉천민 문제를 둘러싼 이념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불가촉천민들은 인간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아래 있는 무엇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가장 비천하다고 여기는 직업에 종사해왔다. 오물 수거, 시체 처리, 가죽 가공, 세탁, 도기 제조 등이 주로 그들의 몫이었다. 상위카스트들은 그들과 접촉하거나 심지어는 그림자가 스치기만 해도 오염된다고 생각했다. 일부 남부지방에서는 그들을 보기만 해도 오염된다고 생각했기에 불가촉천민은 밤에만 활동해야 했다. 또한 그들에겐 사원 출입이 금지되고, 마을 공동우물의 물을 긷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신발을 신을 수도 없었고, 버스나 기차에 빈자리가 있어도 앉을 수 없었다. 이러한 극단적 차별을 철폐해야만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암베드카르와 간디가 모두 동의하였으나, 암베드카르가 이러한 차별을 낳는 카스트제도를 철폐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간디는 카스트제도가 인도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에 카스트제도 내에서 상위 카스트가 하위 카스트에게 자비를 베품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간디는 “밥벌이를 하는 방법에 관한 한, 자신이 속한 계급의 직종을 따라야 한다. 이는 조상 대대로 물려 오는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암베드카르에게는 조상이 물려 준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적으로 부당한 것이었다. 그럴 경우에는 각자 자신의 능력에 맞고 좀더 많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처음부터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불가촉천민들은 간디가 그들에게 붙여준 신의 자녀라는 의미의 ‘하리잔’(Harijan)이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핍박받는 자라는 뜻의 ‘달리트’(dalit)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달리트’는 불가촉천민의 대표적 명칭이 되었다. 위대한 영혼 간디 역시도 자신의 계급성을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일까?
결국 공공시설의 이용은 물론이고 최하층민을 위한 의석 및 공직 할당 제도까지 암베드카르의 영향으로 불가촉천민의 인권이 크게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도 불가촉천민들에 대한 차별이 생활 곳곳에서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불가촉천민들은 아무리 인도 법률이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고 불가촉천민 제도가 불법임을 언급하더라도 상위 카스트들의 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힌두교를 버리는 것만이 자신들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고는 개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개종의 시작은 1956년 암베드카르가 20만명의 불가촉천민들을 이끌고 불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로의 개종이 가장 많은데, 그것은 인도에서 일어난 종교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보다 거부감이 작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종이 잦아지자 남인도의 Tamil Nadu주를 비롯하여 Madhya Pradesh, Orissa, Arunachal Pradesh, Gujarat주에서는 개종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해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이것은 상위카스트들이 불가촉천민들을 자신들의 사회 속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 그들이 힌두교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 법안은 형식적으로는 강제적이거나, 사기성이 있거나, 정당하지 않은 동기 때문에 개종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밝혔으나 많은 사람들은 기준의 애매모호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경찰 또한 모든 개종행사를 봉쇄하고, 이슬람 율법학자인 몰비들이 지역 당국에 통고 없이 주민들을 개종시키면 구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많은 수의 불가촉천민들이 힌두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고 만약 개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존엄성을 줄 수 있다면 감옥에 가더라도 개종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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