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2009. 02. 14
[아름다운여행] 마이소르(Mysore), 첸나이(Chennai) 소개와 사진입니다
마이소르 (Mysore)
마이소르의 얼굴은 다양하다. 전통적으로 행 산업이 발달한 탓에 ‘백단향의 도시’라는 매혹적인 이름이 있는가 하면, 영국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군주 티푸 술탄으로 인해 남인도 민족주의의 메카라는 영광 어린 이름도 있다. 반면, 현재까니 남아 있는 마하라자의 웅장한 궁전으로, 인도에서 가장 화려한 10대 도시 중 하나로도 손꼽힌다.
마이소르는 와디야르 왕조를 무력으로 찬탈한 하이데르 알 리가 등장하면서부터 인도사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데르 알리는 인근의 망갈로르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거나 외국인 용병을 받아들이는 등, 군대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펼쳐 주목받았다. 하지만, 인도를 한입에 털어넣고 싶었던 영국에게, 바르게 세력을 넓혀가는 하이데르 알리의 존재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것. 결국 양국 간의 지리한 다툼은 하이데르 알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치푸 술탄이 제4차 마이소르 전쟁에서 전사한 뒤에야 종지부를 찍게 됐다.
영국이라는 거대 세력에 맞서 독립을 지키려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지만, 그들의 기상과 정신만큼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마이소르를 가리켜 ‘까르나따까 주의 자부심’이라 부를 정도니, 마이소르 주민들의 자부심을 짐작할 만하다.
마이소르 궁전
[img:b.jpg,align=,width=460,height=345,vspace=0,hspace=0,border=1]
[img:bb.jpg,align=,width=460,height=309,vspace=0,hspace=0,border=1]
[img:bbb.jpg,align=,width=460,height=309,vspace=0,hspace=0,border=1]
첸나이(Chennai)
[img:bbbb.jpg,align=,width=189,height=300,vspace=0,hspace=0,border=1]
[img:bbbbb.jpg,align=,width=460,height=656,vspace=0,hspace=0,border=1]
첸나이는 델리, 뭄바이, 꼴까따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4대 도시 중 하나다. 촐라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 관할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첸나이는, 1639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도시 개발에 뛰러들면서 남인도의 대도시로 거듭났다. 인도 독립 후, 첸나이는 북인도와 확연히 다른 독자적인 성격을 디게 된다. 당시의 인도 정부가 행정 등에 있어 남인도와 북인도를 차별한 것이, 자존심 강한 타밀나두 주 사람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언어 문제는 민족의 자존심까지 들먹거릴 정도로 첨예한 갈등의 대상이었다. 1960년대 이후, 인도 중앙 정부는 힌디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이 타밀나두 지방 정부의 민족의식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결국 중앙정부의 힌디 공용어 명령에 맞서 타밀나두는 모든 힌디어 안내판과 간판을 철거하는 초강경 조치로 맞서게 된다.
결국 타밀어가 주의 공식 언어로 확정되고, 힌디어가 제2언어로 주저앉으면서 대립은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서로 감정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일. 오죽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동거하는 것에 비유될 정도다. 수많은 식민 역사로 점철된 북인도와 달리 첸나이를 비롯한 타밀나두 지역은 약 200년 남짓 영국 지배만을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인도를 오래 여행한 사람들은 첸나이야말로 외래문화에서 자유로운 진정한 인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곳 첸나이는 또한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가장 멀리 인도 땅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던 곳으로
도마의 무덤이 있는 '산토메 성당', 도마가 머물렀다 하는 '성 도마의 동굴', 도마가 사형을 당한 '도마의 언덕'
덩의 유적지도 있다고 합니다.
마이소르의 얼굴은 다양하다. 전통적으로 행 산업이 발달한 탓에 ‘백단향의 도시’라는 매혹적인 이름이 있는가 하면, 영국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군주 티푸 술탄으로 인해 남인도 민족주의의 메카라는 영광 어린 이름도 있다. 반면, 현재까니 남아 있는 마하라자의 웅장한 궁전으로, 인도에서 가장 화려한 10대 도시 중 하나로도 손꼽힌다.
마이소르는 와디야르 왕조를 무력으로 찬탈한 하이데르 알 리가 등장하면서부터 인도사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데르 알리는 인근의 망갈로르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거나 외국인 용병을 받아들이는 등, 군대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펼쳐 주목받았다. 하지만, 인도를 한입에 털어넣고 싶었던 영국에게, 바르게 세력을 넓혀가는 하이데르 알리의 존재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것. 결국 양국 간의 지리한 다툼은 하이데르 알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치푸 술탄이 제4차 마이소르 전쟁에서 전사한 뒤에야 종지부를 찍게 됐다.
영국이라는 거대 세력에 맞서 독립을 지키려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지만, 그들의 기상과 정신만큼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마이소르를 가리켜 ‘까르나따까 주의 자부심’이라 부를 정도니, 마이소르 주민들의 자부심을 짐작할 만하다.
마이소르 궁전
[img:b.jpg,align=,width=460,height=345,vspace=0,hspace=0,border=1]
[img:bb.jpg,align=,width=460,height=309,vspace=0,hspace=0,border=1]
[img:bbb.jpg,align=,width=460,height=309,vspace=0,hspace=0,border=1]
첸나이(Chennai)
[img:bbbb.jpg,align=,width=189,height=300,vspace=0,hspace=0,border=1]
[img:bbbbb.jpg,align=,width=460,height=656,vspace=0,hspace=0,border=1]
첸나이는 델리, 뭄바이, 꼴까따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4대 도시 중 하나다. 촐라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 관할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첸나이는, 1639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도시 개발에 뛰러들면서 남인도의 대도시로 거듭났다. 인도 독립 후, 첸나이는 북인도와 확연히 다른 독자적인 성격을 디게 된다. 당시의 인도 정부가 행정 등에 있어 남인도와 북인도를 차별한 것이, 자존심 강한 타밀나두 주 사람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언어 문제는 민족의 자존심까지 들먹거릴 정도로 첨예한 갈등의 대상이었다. 1960년대 이후, 인도 중앙 정부는 힌디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이 타밀나두 지방 정부의 민족의식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결국 중앙정부의 힌디 공용어 명령에 맞서 타밀나두는 모든 힌디어 안내판과 간판을 철거하는 초강경 조치로 맞서게 된다.
결국 타밀어가 주의 공식 언어로 확정되고, 힌디어가 제2언어로 주저앉으면서 대립은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서로 감정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일. 오죽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동거하는 것에 비유될 정도다. 수많은 식민 역사로 점철된 북인도와 달리 첸나이를 비롯한 타밀나두 지역은 약 200년 남짓 영국 지배만을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인도를 오래 여행한 사람들은 첸나이야말로 외래문화에서 자유로운 진정한 인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곳 첸나이는 또한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가장 멀리 인도 땅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던 곳으로
도마의 무덤이 있는 '산토메 성당', 도마가 머물렀다 하는 '성 도마의 동굴', 도마가 사형을 당한 '도마의 언덕'
덩의 유적지도 있다고 합니다.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