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2009. 02. 13
1.[아름다운여행] ‘달리트’ 신분 굴레 벗고 기지개 켠다-오지수 2.[아름다운여행] 방갈루루-오지수
1.[아름다운여행] ‘달리트’ 신분 굴레 벗고 기지개 켠다-오지수
뭄바이에 도착했으니 인도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뭄바이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최고의 관광지임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1911년, 영국 왕 조지 5세 내외의 인도 방문을 기념해 세워진 인도문은 그 옛날 로마인들이 개선장군을 기리기 위해 축조한 개선문을 본뜬 것이다. 역대 영국 총독들은 이 문을 통해 인도로 들어와 식민통치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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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뒤돌아서자 최고급 호텔 타지마할이 위용을 드러냈다. 인도 최대의 토착기업인 타타그룹을 창업한 잠제트지 나세르완지 타타가 영국 친구와 함께 아폴로 호텔에 식사하러 갔다가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거절당하자 바로 그 호텔 앞에 1903년 인도 제일의 호텔로 지은 것이다. ‘인도의 자존심’답게 외부 장식도 대단했지만 내부 장식이나 구조는 인도 상류층의 삶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서 나와 시내 중심의 처치게이트 역에서 출발하는 교외선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마하락슈미 역에 내리자 이와는 전혀 딴판의 풍경이 펼쳐졌다. 역사부터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 데다 온갖 쓰레기가 길을 뒤덮었고 일대에 들어선 집들도 매우 낡았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세탁물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널린 세탁물 사이사이로 빨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그 수는 한둘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비가트였다.
계층과 계급 이동 엄격히 금지 … 짐승보다 못한 대우
여기서 도비란 세탁 일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인도인들은 ‘도비왈라(빨래를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라 불렀다. 인도에선 세탁과 쓰레기 치우기, 야자열매 따기, 넝마주이, 염색, 채석 일, 시신 처리 등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최하층 계급 사람을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이라 하는데, 도비왈라는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호기심이 일어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사유물’이라며 돈을 내라고 했다. 200루피 부르는 것을 150루피로 깎고는 도비가트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안내인은 탁한 물이 담겨 있는 물통과 잿물 처리장, 빨래 삶는 시설 등을 보여주었다. 뭄바이에서 나오는 세탁물을 다 모아놓은 듯 빨랫감의 양은 실로 엄청났다.
도비왈라들은 빨랫감을 잿물 통에 담갔다가 꺼내서는 손으로 찌든 때를 제거하기도 하고, 더러는 물먹은 빨랫감을 돌바닥에 열심히 내리치기도 했다. 대부분 거의 반라 차림에 맨발이었는데,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안내인은 모두 5000명쯤 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이왕 할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하자는 뜻으로 보였다. 심지어 이방인인 나를 보고는 반갑다는 표시로 씩 웃기도 했다. 세탁장 밖에선 릭셔와 자전거로 세탁물이 연신 실려 오고 실려 나갔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나 집은 볼품없는 게 빈민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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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의 야외공동 빨래터인 도비가트 전경(왼쪽 사진). 도비가트에서 세탁 일을 하고 있는 달리트들.
인도가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군인·지주), 바이샤(상인), 수드라(노예) 등 4가지로 이루어진 신분제(카스트) 사회라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현지에 와서 보니 이들 네 계급 외에도 도비왈라처럼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최하층 계급(그래서 ‘아웃 카스트’라고도 한다)이 존재했다. 이들은 닿기만 해도 더러워진다며 누구도 이들과 접촉하기를 꺼리고, 심한 경우에는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 해서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린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라곤 개와 나귀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도에선 신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뀔 수 없으며, 따라서 직업을 바꿀 수도 없다. 계층과 계급 이동이 엄격히 금지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카스트 간에는 결혼도 못하며 함께 교육을 받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 신분제도는 기원전 1000년경 유럽에서 건너온 아리아인에 의해 쓰여진 ‘리그베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도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살아 있는 한 이 제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걸 그들은 ‘카르마(업보 또는 운명)’라고 한다. 뭄바이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인도인들은 사람의 이름만 보고도 그가 어느 지역 출신이고 어느 신분에 속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은 전체 인구의 16%인 1억8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대부분이 극빈층이어서 이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빈곤 퇴치는 요원한 일일 것 같았다.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간디도 ‘주인은 영원히 주인으로, 노예는 영원히 노예로’ 살아가게 하는 제도는 옳은 게 아니라며 사회의 최약자인 불가촉천민에게 남다른 애정을 나타냈다. 그는 이들을 ‘신의 아들’이란 뜻의 하리잔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독실한 힌두교도여서 그런지 신분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독립(1947년) 직후 인도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불가촉천민 출신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1891~1956)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헌법에 삽입하고 인간에 대한 차별을 일절 금지하는 법률도 제정하는 등 실질적인 처우 개선에 노력했다. 그는 또 이들을 ‘억압받는 자’란 뜻에서 달리트(dalit)라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평소 △신분제도는 인도 사회를 파멸시키고 있고 △사성제도를 기초로 인도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도 국민 전체에게도 이롭지 않으며 △인도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원리를 존중하는 종교적 바탕 위에서 재구성되어야 하고 △힌두 경전들이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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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미술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뭄바이 학생들. 이들 중에는 달리트도 있다. ② 하층민들의 절반은 달리트라고 한다. ③ 빈 병을 나르고 있는 하층민.
그렇지만 불가촉천민들이 인도 사회질서를 위협하고 있다며 달리트의 처우 개선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달리트의 사원 출입도 금했고 저수지의 물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달리트가 입을 대면 저수지의 물이 오염된다는 게 이유였다. 암베드카르는 헌법상의 평등 조항만으로는 달리트의 지위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인도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카스트를 기초로 성립된 힌두교가 존재하는 한 카스트의 벽을 허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56년 10월 “나는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으나 힌두교인으로 죽진 않았다”며 나그푸르란 곳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달리트와 함께 카스트제도가 없는 불교로 개종했다. “붓다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곧 노예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의 해방, 계급의식으로부터의 해방,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연설을 한 다음이었다. 그 덕분인지 불교로 개종한 달리트는 현재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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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하층민들은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암베드카르 박사가 강조한 것은 달리트의 교육이었다. 그는 “교육은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력과 감성과 의지력을 키워준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 자신이야말로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영국에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한 덕분에 제헌의원이 되고 또 법무장관이 되었으니 말이다.
암베드카르 박사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은 달리트 출신의 일자무식 철도 노동자 ‘다무’는 자기 아들들만은 자기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만들고 싶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최고의 교육을 했다. 암베드카르 박사가 “부모는 자녀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한때 ‘깡패’를 꿈꾸었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엘리트 코스를 밟아 인도에서 대학을 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인도중앙은행에 들어가 현재 최고 자문관이자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맡고 있다. 그는 달리트들의 삶과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은 ‘불가촉천민’(이미 영역판도 나와 있다)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나렌드라 자다브(1953년생)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인도 정부에서도 공직과 주의회 의석 할당
필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경제수도 뭄바이의 샤히드 바가트 싱가(街)에 위치한 인도중앙은행 신관 8층 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프랑스에선 신분의 벽을 허물기 위해 피를 요구한 대혁명(1789년)을 거쳤는데 과연 교육만으로 인도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그의 견해가 궁금해서였다.
그는 먼저 “달리트는 깨어나고 있다”며 말문을 텄다. 그러고는 “인도는 지금 새롭게 태어나고(re-emerging) 있다”고 덧붙였다.
“상당수의 젊은 달리트들이 지금 고등교육을 받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림과 춤, 영화, 음악, 컴퓨터 등 학업 외의 분야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리고 달리트들이 자녀 교육에 열을 올린 결과,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늘어나 인도 사회를 점점 경쟁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게 바로 인도를 변화시키고 있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도는 신분상의 불평등을 혁명과 같은 급격한 방식이 아니라 교육과 자아 발견이라는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자다브 박사는 인도 정부가 행하고 있는 달리트 지원 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정부 공직과 주의회, 연방의회에서의 의석 할당 △공립학교와 국공립대학 입학 시 가산점(1000점 중 50점) 부여 △ 취업 시 일정 비율(16.5%)의 고용 의무화 등이 그것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호탕하게 웃으며 정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호감 가는 인상의 그에게서 나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인도 사회의 변화가 긍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증표 같기도 했다.
인터뷰|나렌드라 자다브 박사
“내 운명 스스로 선택, 교육이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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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브 박사가 자신이 쓴 책 ‘불가촉천민’의 홍보물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부모 덕분에 오늘의 지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부모의 역할은 어떠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단순히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녀의 운명을 바꿔주도록 노력해야 하며, 자녀들 스스로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경우를 말하면 암베드카르 박사에게서 영향을 받은 아버지가 나를 공부시켰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절정기에 있다. 나에게는 카르마가 없다. 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한 결과다.”
-그렇다면 교육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교육이야말로 한 인간을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여건이 된다면 중앙은행 총재가 되고 싶다. 달리트 출신인 내가 서명한 돈이 인도 전역에 유통된다면 달리트들에게 큰 용기를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건 내 나름의 달리트 권리 쟁취 운동이다. 대통령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인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그 길이 가장 효과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관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가.
“나보다 두 계급이나 높은 바이샤 출신의 아내가 있다. 상인계급이라 부자이기도 하다. 그녀와는 캠퍼스에서 만나 장래를 약속했는데, 장모의 반대가 심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결국 이겨 결혼에 성공, 현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두 자녀 모두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아들은 MBA를 취득했고, 딸은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다. 박사 출신의 아내는 인도 최대 은행인 ICICI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2. [아름다운여행] 방갈루루-오지수
[img:w22.jpg,align=,width=350,height=237,vspace=0,hspace=0,border=1]토요일 이른 아침 방갈루루 중심가인 마하트마 간디 거리엔 차량 통행이 뜸하다. 사무실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인도가 세계인의 화두로 등장했다. 중국과 함께 떠오르는 샛별이라며, ‘친디아’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경제전문가들이 2035년엔 ‘제3의 축’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올해 1월 스위스 휴양지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인도 경제를 주제로 다루기까지 했다. 인도는 이 포럼에 30여 명의 정치·경제·문화계 인사들을 파견해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경제를 가진 민주주의국가”라고 선전하는 데 열을 올렸다. 과연 인도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을까. 또 연평균 8% 내외의 성장을 지속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첫 기착지 뭄바이에서 인도중앙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나렌드라 자다브 박사를 만나 그 이유부터 물어보았다. 그는 25세 이하 인구가 전체(11억6000만 명)의 54%를 차지한다며 인도가 젊다는 점을 가장 먼저 들었다(평균연령은 24.7세). 젊은이가 많다 보니 한 해 대학 졸업자 수가 360만 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이공계 출신만 45만 명에 달하고 회계학 전공자는 7만 명, 경영대학원에서도 8만9000명의 MBA를 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이공계 교육이라면 인도공과대학(IIT)을 빼놓을 수 없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입시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고 해서 다음 날 IIT의 7개 캠퍼스 가운데 하나인 뭄바이 캠퍼스를 찾았다. 물이 맑고 주위 풍광이 아름다운 포와이 호수를 끼고 있는 그곳에서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재학 중에도 경쟁은 치열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9명이 한 조가 돼 진행되는 교수와의 토론은 밤을 새워 준비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경쟁이 결국 최고의 경쟁력을 낳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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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갈루루 시내에 있는 HP(휴렛패커드) 사옥 입구. 정원처럼 꾸며놓았다.
자다브 박사는 인도인은 개념화하는 능력이 뛰어나 소프트웨어 산업에 적합하다는 점을 두 번째 이유로 꼽았다. 그는 인도에서 종교가 발달한 것 역시 그런 능력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개념화의 장점은 상상력과 지구력만 있으면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인도 경제성장의 힘은 경제 외적 요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21세기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이런 것이라면 인도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는 또 중국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오퍼레이션 능력이 뛰어나 제조업에 적합하다는 점에서 인도와 비교된다고 했다.
뭄바이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은 ‘인도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방갈루루(옛 방갈로르)에 몰려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고 했다. 콜카타 여행을 마치자마자 이곳으로 날아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인도에는 방갈루루 외에도 하이데라바드와 첸나이, 퓨네 등의 IT 도시가 있다). 공항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다국적기업의 빌딩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공사 중인 곳도 많아 교통체증이 심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긴 하나 북부 도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고, 거리의 녹색 가로수가 시원함을 선사했다.
인도 대학생들 방갈루루의 소프트웨어 회사 취업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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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는 이제 인도 젊은이들에게도 필수품이 됐다(왼쪽 사진). 공원에 자리잡은 빅토리아 양식의 방갈루루 박물관 정면.
가장 번화하다는, 곧게 뻗은 2.5km의 마하트마 간디 거리에선 벤츠 등 최고급 승용차들이 심심찮게 목격됐다. 그렇다고 릭샤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여느 도시에 비해 훨씬 적었다. 다국적기업 빌딩들이 줄을 이은 거리에는 고급 쇼핑센터와 레스토랑, 호텔도 들어서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장인들은 인도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이곳이 과연 인도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인도 남부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방갈루루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900m 지점의 고원지대라 기후가 쾌적해 IT 산업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인도 최고의 소프트웨어 업체인 인포시스(Infosys)와 위프로(Wipro) 등을 비롯해 1600개가 넘는 IT 업체가 자리잡고 있어 IT 인재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으며 △컴퓨터와 공학 일반에 관한 전문지식과 함께 영어에 능통한 고급인력이 풍부하고 △연간 소프트웨어 수출액이 12억 달러쯤 되고, IT 분야 고용인원만도 24만 명에 이른다는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방갈루루는 미국의 실리콘밸리, 보스턴, 런던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큰 테크놀로지 시티로 통한다. 미국을 제외한 지역 가운데 이곳처럼 과학자와 연구자, 엔지니어 등 광범위한 과학연구진을 가진 도시는 없다는 것이다.
방갈루루가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1985년 미국의 반도체 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다국적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하이테크 개발센터를 설립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콜센터를 운영하는 미국 기업들이 이곳에서 자국보다 훨씬 싼 임금의 인력을 충원한 데다, 1999년 말 Y2K 작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면서 크게 부상했다. 이제는 이곳 산업의 중심이 자동제어, 칩 설계, 통신 소프트웨어, 금융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동 중이다. 초대 총리 네루가 “방갈로르는 인도의 미래를 책임질 도시”라고 한 말이 그대로 적중하고 있는 셈이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의 물가나 임금 수준은 턱없이 낮다. 우리의 5분의 1 수준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고, 미국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도 채 안 된다. 인도를 배낭여행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 달 동안 먹고 자고 이동하고(장·단거리 포함), 인도인보다 10배 내지 20배 비싼 입장권을 사서 유적지를 둘러보고 몇 가지 선물을 사도 500달러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인 대부분은 하루 30루피(약 5000원)로 산다는 점을 고려하면 IIT를 졸업한 신입사원이 받는 월 500달러 급여는 결코 낮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낮은 급여에도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1985년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입성이 IT 도시 발돋움 계기
인도 3위의 소프트웨어 업체 위프로와 약속이 돼 있어 시내에서 10km 정도 외곽에 위치한 호스르 가(街) 사무실을 찾았다. 홍보담당 아라빈드 씨는 먼저 위프로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지난해에 17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직원은 4만2000명에 이르며, 비즈니스 아웃소싱이 주 사업이라고 했다. 기초가 아주 탄탄하고, 가치를 지향하며, 직원의 능력과 창의력을 믿고 일을 맡기고, 원 스톱 솔루션으로 소비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게 위프로의 강점이라고 덧붙였다. ‘비즈니스 위크’지도 지난해 인도·중국 특집에서 위프로를 인도의 정보산업 혁명의 주인공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의 선두주자일 뿐 아니라 비즈니스 아웃소싱의 개척자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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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상낙원과 같은 위프로 본사 사옥. ② 위프로 아짐 프렘지 회장.
③ 방갈루루는 ‘인도의 실리콘밸리’라 불릴 정도로 최첨단 도시이나 코끼리가 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④ 커피 브레이크를 즐기는 위프로 본사 직원들.
신규인력 채용 방식에 대해 묻자 먼저 업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응모자를 받아 기술 적격 여부와 팀원들과의 조화, 의사소통·문제해결 능력, 그리고 과거 경력 등 세 가지 분야를 면밀하게 검토해 선발한다고 대답했다. 신분이나 출신 지역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의 IT 산업은 이제 시작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앞으로의 성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방갈루루 외곽에만 열 곳이 넘는 위프로 사무소가 있다면서 이 가운데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당연히 본사라고 답하자, 그는 택시(회사 소유 업무차량은 없고 모두 아웃소싱으로 조달한다고 했다)를 불러 6km 정도의 시골길을 달려 본사로 안내했다. 좁고 꼬불꼬불한 길은 곳곳이 파헤쳐져 있었고 먼지도 시도 때도 없이 날렸다. 그 위로 소달구지도 지나가고 헐벗은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길 주변에는 고층빌딩과 아파트 등이 들어서느라 복잡한데 전선줄마저 엉켜 있어 보기 사나웠다.
그러다 담이 쳐진 본사에 들어서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가 펼쳐졌다. 꽃과 수목이 자라는 정원을 가운데 두고 몇 개의 건물이 그 주위를 감싸고 있었는데, 건물은 3층 정도라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라빈드 씨는 아짐 프렘지 회장이 설립 당시부터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우리는 직원카페에 들러 차를 한잔 하고 커피 브레이크를 즐기는 직원들과 만난 뒤 수영장과 체력단련장, 휴게실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무실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보안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모습은 8km 정도 떨어진 ‘일렉트로닉스 시티’(위프로와 인포시스 등 많은 소프트웨어 업체가 입주해 있다)에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직원들에게 최고의 근무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보였다. 소프트웨어 산업은 제조업과 달리 상상력과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런 낙원은 지금은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이 점이 자꾸 커져 면(面)으로 바뀌면 인도 전체를 뒤덮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프렘지 회장의 저택은 건물 뒤에 있다고 했으나 울창한 수목이 가로막아 보이진 않았다. 그의 일정은 비서만 알 뿐이고, 언론 노출도 꺼려 베일에 싸인 인물로 유명했다(이 점에서 인포시스의 난단 닐레카니 회장과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내가 회장에 대해 궁금해하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들려주었다.
프렘지 회장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던 66년(21세), 조그만 식용유 회사를 운영하는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80년대에 들어서 컴퓨터 사업에 손댄 뒤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위프로를 세웠고, 이 회사가 인도 제3의 소프트 업체로 성장하면서 회사 주식 82%를 소유한 프렘지 회장은 인도 두 번째 갑부(개인재산 110억 달러)가 됐다는 것이다.
재산 110억 달러 프렘지 회장 검소한 생활로 유명
프렘지 회장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면서 전 세계 사무소에서 보내온 e메일 보고서를 읽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침 7시에 집무실로 출근해 스크램블 에그와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때운 다음 회의를 주재하고 그 이후 자기 일에 몰두한다고 했다. 퇴근은 오후 7시라 하루 14시간을 근무하는 셈이다. 프렘지 회장은 가정과 회사밖에 모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또 검소한 생활습관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갑부임에도 출장 갈 때는 꼭 이코노미석을 타며 호텔에 머물 때도 스위트룸을 사양한다는 것. 인도로 가는 기내에서 만난 IIT 출신의 선박 디자이너 크리슈난 씨가 인도의 지도자들은 “심플 라이프를 즐긴다”고 했는데, 듣고 보니 프렘지 회장이야말로 그 전형이라 할 만했다. 프렘지 회장은 탁월함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탁월함이란 잠재적인 능력과 끼를 발휘해 최고의 것을 창출하는 용기와 노력을 뜻한다고 했다. 이는 내면적인 성숙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직원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쏟아 붓고 그 대가로 돈을 벌고 있으나 그 돈을 개인적인 사치나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 쓰려고 하는 프렘지 회장. 그를 생각하자 인도의 앞날이 더욱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그를 두고 세계 언론은 ‘IT 차르(황제)’ 또는 ‘기술 왕(Tech K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인도는 가장 인도다운 방식으로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뭄바이에 도착했으니 인도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뭄바이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최고의 관광지임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1911년, 영국 왕 조지 5세 내외의 인도 방문을 기념해 세워진 인도문은 그 옛날 로마인들이 개선장군을 기리기 위해 축조한 개선문을 본뜬 것이다. 역대 영국 총독들은 이 문을 통해 인도로 들어와 식민통치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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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뒤돌아서자 최고급 호텔 타지마할이 위용을 드러냈다. 인도 최대의 토착기업인 타타그룹을 창업한 잠제트지 나세르완지 타타가 영국 친구와 함께 아폴로 호텔에 식사하러 갔다가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거절당하자 바로 그 호텔 앞에 1903년 인도 제일의 호텔로 지은 것이다. ‘인도의 자존심’답게 외부 장식도 대단했지만 내부 장식이나 구조는 인도 상류층의 삶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서 나와 시내 중심의 처치게이트 역에서 출발하는 교외선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마하락슈미 역에 내리자 이와는 전혀 딴판의 풍경이 펼쳐졌다. 역사부터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 데다 온갖 쓰레기가 길을 뒤덮었고 일대에 들어선 집들도 매우 낡았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세탁물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널린 세탁물 사이사이로 빨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그 수는 한둘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비가트였다.
계층과 계급 이동 엄격히 금지 … 짐승보다 못한 대우
여기서 도비란 세탁 일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인도인들은 ‘도비왈라(빨래를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라 불렀다. 인도에선 세탁과 쓰레기 치우기, 야자열매 따기, 넝마주이, 염색, 채석 일, 시신 처리 등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최하층 계급 사람을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이라 하는데, 도비왈라는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호기심이 일어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사유물’이라며 돈을 내라고 했다. 200루피 부르는 것을 150루피로 깎고는 도비가트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안내인은 탁한 물이 담겨 있는 물통과 잿물 처리장, 빨래 삶는 시설 등을 보여주었다. 뭄바이에서 나오는 세탁물을 다 모아놓은 듯 빨랫감의 양은 실로 엄청났다.
도비왈라들은 빨랫감을 잿물 통에 담갔다가 꺼내서는 손으로 찌든 때를 제거하기도 하고, 더러는 물먹은 빨랫감을 돌바닥에 열심히 내리치기도 했다. 대부분 거의 반라 차림에 맨발이었는데,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안내인은 모두 5000명쯤 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이왕 할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하자는 뜻으로 보였다. 심지어 이방인인 나를 보고는 반갑다는 표시로 씩 웃기도 했다. 세탁장 밖에선 릭셔와 자전거로 세탁물이 연신 실려 오고 실려 나갔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나 집은 볼품없는 게 빈민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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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의 야외공동 빨래터인 도비가트 전경(왼쪽 사진). 도비가트에서 세탁 일을 하고 있는 달리트들.
인도가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군인·지주), 바이샤(상인), 수드라(노예) 등 4가지로 이루어진 신분제(카스트) 사회라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현지에 와서 보니 이들 네 계급 외에도 도비왈라처럼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최하층 계급(그래서 ‘아웃 카스트’라고도 한다)이 존재했다. 이들은 닿기만 해도 더러워진다며 누구도 이들과 접촉하기를 꺼리고, 심한 경우에는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 해서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린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라곤 개와 나귀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도에선 신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뀔 수 없으며, 따라서 직업을 바꿀 수도 없다. 계층과 계급 이동이 엄격히 금지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카스트 간에는 결혼도 못하며 함께 교육을 받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 신분제도는 기원전 1000년경 유럽에서 건너온 아리아인에 의해 쓰여진 ‘리그베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도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살아 있는 한 이 제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걸 그들은 ‘카르마(업보 또는 운명)’라고 한다. 뭄바이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인도인들은 사람의 이름만 보고도 그가 어느 지역 출신이고 어느 신분에 속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은 전체 인구의 16%인 1억8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대부분이 극빈층이어서 이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빈곤 퇴치는 요원한 일일 것 같았다.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간디도 ‘주인은 영원히 주인으로, 노예는 영원히 노예로’ 살아가게 하는 제도는 옳은 게 아니라며 사회의 최약자인 불가촉천민에게 남다른 애정을 나타냈다. 그는 이들을 ‘신의 아들’이란 뜻의 하리잔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독실한 힌두교도여서 그런지 신분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독립(1947년) 직후 인도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불가촉천민 출신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1891~1956)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헌법에 삽입하고 인간에 대한 차별을 일절 금지하는 법률도 제정하는 등 실질적인 처우 개선에 노력했다. 그는 또 이들을 ‘억압받는 자’란 뜻에서 달리트(dalit)라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평소 △신분제도는 인도 사회를 파멸시키고 있고 △사성제도를 기초로 인도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도 국민 전체에게도 이롭지 않으며 △인도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원리를 존중하는 종교적 바탕 위에서 재구성되어야 하고 △힌두 경전들이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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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미술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뭄바이 학생들. 이들 중에는 달리트도 있다. ② 하층민들의 절반은 달리트라고 한다. ③ 빈 병을 나르고 있는 하층민.
그렇지만 불가촉천민들이 인도 사회질서를 위협하고 있다며 달리트의 처우 개선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달리트의 사원 출입도 금했고 저수지의 물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달리트가 입을 대면 저수지의 물이 오염된다는 게 이유였다. 암베드카르는 헌법상의 평등 조항만으로는 달리트의 지위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인도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카스트를 기초로 성립된 힌두교가 존재하는 한 카스트의 벽을 허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56년 10월 “나는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으나 힌두교인으로 죽진 않았다”며 나그푸르란 곳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달리트와 함께 카스트제도가 없는 불교로 개종했다. “붓다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곧 노예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의 해방, 계급의식으로부터의 해방,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연설을 한 다음이었다. 그 덕분인지 불교로 개종한 달리트는 현재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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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하층민들은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암베드카르 박사가 강조한 것은 달리트의 교육이었다. 그는 “교육은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력과 감성과 의지력을 키워준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 자신이야말로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영국에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한 덕분에 제헌의원이 되고 또 법무장관이 되었으니 말이다.
암베드카르 박사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은 달리트 출신의 일자무식 철도 노동자 ‘다무’는 자기 아들들만은 자기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만들고 싶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최고의 교육을 했다. 암베드카르 박사가 “부모는 자녀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한때 ‘깡패’를 꿈꾸었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엘리트 코스를 밟아 인도에서 대학을 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인도중앙은행에 들어가 현재 최고 자문관이자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맡고 있다. 그는 달리트들의 삶과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은 ‘불가촉천민’(이미 영역판도 나와 있다)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나렌드라 자다브(1953년생)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인도 정부에서도 공직과 주의회 의석 할당
필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경제수도 뭄바이의 샤히드 바가트 싱가(街)에 위치한 인도중앙은행 신관 8층 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프랑스에선 신분의 벽을 허물기 위해 피를 요구한 대혁명(1789년)을 거쳤는데 과연 교육만으로 인도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그의 견해가 궁금해서였다.
그는 먼저 “달리트는 깨어나고 있다”며 말문을 텄다. 그러고는 “인도는 지금 새롭게 태어나고(re-emerging) 있다”고 덧붙였다.
“상당수의 젊은 달리트들이 지금 고등교육을 받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림과 춤, 영화, 음악, 컴퓨터 등 학업 외의 분야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리고 달리트들이 자녀 교육에 열을 올린 결과,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늘어나 인도 사회를 점점 경쟁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게 바로 인도를 변화시키고 있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도는 신분상의 불평등을 혁명과 같은 급격한 방식이 아니라 교육과 자아 발견이라는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자다브 박사는 인도 정부가 행하고 있는 달리트 지원 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정부 공직과 주의회, 연방의회에서의 의석 할당 △공립학교와 국공립대학 입학 시 가산점(1000점 중 50점) 부여 △ 취업 시 일정 비율(16.5%)의 고용 의무화 등이 그것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호탕하게 웃으며 정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호감 가는 인상의 그에게서 나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인도 사회의 변화가 긍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증표 같기도 했다.
인터뷰|나렌드라 자다브 박사
“내 운명 스스로 선택, 교육이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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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브 박사가 자신이 쓴 책 ‘불가촉천민’의 홍보물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부모 덕분에 오늘의 지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부모의 역할은 어떠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단순히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녀의 운명을 바꿔주도록 노력해야 하며, 자녀들 스스로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경우를 말하면 암베드카르 박사에게서 영향을 받은 아버지가 나를 공부시켰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절정기에 있다. 나에게는 카르마가 없다. 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한 결과다.”
-그렇다면 교육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교육이야말로 한 인간을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여건이 된다면 중앙은행 총재가 되고 싶다. 달리트 출신인 내가 서명한 돈이 인도 전역에 유통된다면 달리트들에게 큰 용기를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건 내 나름의 달리트 권리 쟁취 운동이다. 대통령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인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그 길이 가장 효과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관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가.
“나보다 두 계급이나 높은 바이샤 출신의 아내가 있다. 상인계급이라 부자이기도 하다. 그녀와는 캠퍼스에서 만나 장래를 약속했는데, 장모의 반대가 심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결국 이겨 결혼에 성공, 현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두 자녀 모두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아들은 MBA를 취득했고, 딸은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다. 박사 출신의 아내는 인도 최대 은행인 ICICI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2. [아름다운여행] 방갈루루-오지수
[img:w22.jpg,align=,width=350,height=237,vspace=0,hspace=0,border=1]토요일 이른 아침 방갈루루 중심가인 마하트마 간디 거리엔 차량 통행이 뜸하다. 사무실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인도가 세계인의 화두로 등장했다. 중국과 함께 떠오르는 샛별이라며, ‘친디아’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경제전문가들이 2035년엔 ‘제3의 축’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올해 1월 스위스 휴양지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인도 경제를 주제로 다루기까지 했다. 인도는 이 포럼에 30여 명의 정치·경제·문화계 인사들을 파견해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경제를 가진 민주주의국가”라고 선전하는 데 열을 올렸다. 과연 인도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을까. 또 연평균 8% 내외의 성장을 지속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첫 기착지 뭄바이에서 인도중앙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나렌드라 자다브 박사를 만나 그 이유부터 물어보았다. 그는 25세 이하 인구가 전체(11억6000만 명)의 54%를 차지한다며 인도가 젊다는 점을 가장 먼저 들었다(평균연령은 24.7세). 젊은이가 많다 보니 한 해 대학 졸업자 수가 360만 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이공계 출신만 45만 명에 달하고 회계학 전공자는 7만 명, 경영대학원에서도 8만9000명의 MBA를 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이공계 교육이라면 인도공과대학(IIT)을 빼놓을 수 없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입시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고 해서 다음 날 IIT의 7개 캠퍼스 가운데 하나인 뭄바이 캠퍼스를 찾았다. 물이 맑고 주위 풍광이 아름다운 포와이 호수를 끼고 있는 그곳에서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재학 중에도 경쟁은 치열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9명이 한 조가 돼 진행되는 교수와의 토론은 밤을 새워 준비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경쟁이 결국 최고의 경쟁력을 낳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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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갈루루 시내에 있는 HP(휴렛패커드) 사옥 입구. 정원처럼 꾸며놓았다.
자다브 박사는 인도인은 개념화하는 능력이 뛰어나 소프트웨어 산업에 적합하다는 점을 두 번째 이유로 꼽았다. 그는 인도에서 종교가 발달한 것 역시 그런 능력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개념화의 장점은 상상력과 지구력만 있으면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인도 경제성장의 힘은 경제 외적 요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21세기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이런 것이라면 인도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는 또 중국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오퍼레이션 능력이 뛰어나 제조업에 적합하다는 점에서 인도와 비교된다고 했다.
뭄바이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은 ‘인도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방갈루루(옛 방갈로르)에 몰려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고 했다. 콜카타 여행을 마치자마자 이곳으로 날아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인도에는 방갈루루 외에도 하이데라바드와 첸나이, 퓨네 등의 IT 도시가 있다). 공항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다국적기업의 빌딩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공사 중인 곳도 많아 교통체증이 심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긴 하나 북부 도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고, 거리의 녹색 가로수가 시원함을 선사했다.
인도 대학생들 방갈루루의 소프트웨어 회사 취업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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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는 이제 인도 젊은이들에게도 필수품이 됐다(왼쪽 사진). 공원에 자리잡은 빅토리아 양식의 방갈루루 박물관 정면.
가장 번화하다는, 곧게 뻗은 2.5km의 마하트마 간디 거리에선 벤츠 등 최고급 승용차들이 심심찮게 목격됐다. 그렇다고 릭샤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여느 도시에 비해 훨씬 적었다. 다국적기업 빌딩들이 줄을 이은 거리에는 고급 쇼핑센터와 레스토랑, 호텔도 들어서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장인들은 인도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이곳이 과연 인도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인도 남부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방갈루루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900m 지점의 고원지대라 기후가 쾌적해 IT 산업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인도 최고의 소프트웨어 업체인 인포시스(Infosys)와 위프로(Wipro) 등을 비롯해 1600개가 넘는 IT 업체가 자리잡고 있어 IT 인재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으며 △컴퓨터와 공학 일반에 관한 전문지식과 함께 영어에 능통한 고급인력이 풍부하고 △연간 소프트웨어 수출액이 12억 달러쯤 되고, IT 분야 고용인원만도 24만 명에 이른다는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방갈루루는 미국의 실리콘밸리, 보스턴, 런던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큰 테크놀로지 시티로 통한다. 미국을 제외한 지역 가운데 이곳처럼 과학자와 연구자, 엔지니어 등 광범위한 과학연구진을 가진 도시는 없다는 것이다.
방갈루루가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1985년 미국의 반도체 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다국적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하이테크 개발센터를 설립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콜센터를 운영하는 미국 기업들이 이곳에서 자국보다 훨씬 싼 임금의 인력을 충원한 데다, 1999년 말 Y2K 작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면서 크게 부상했다. 이제는 이곳 산업의 중심이 자동제어, 칩 설계, 통신 소프트웨어, 금융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동 중이다. 초대 총리 네루가 “방갈로르는 인도의 미래를 책임질 도시”라고 한 말이 그대로 적중하고 있는 셈이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의 물가나 임금 수준은 턱없이 낮다. 우리의 5분의 1 수준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고, 미국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도 채 안 된다. 인도를 배낭여행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 달 동안 먹고 자고 이동하고(장·단거리 포함), 인도인보다 10배 내지 20배 비싼 입장권을 사서 유적지를 둘러보고 몇 가지 선물을 사도 500달러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인 대부분은 하루 30루피(약 5000원)로 산다는 점을 고려하면 IIT를 졸업한 신입사원이 받는 월 500달러 급여는 결코 낮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낮은 급여에도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1985년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입성이 IT 도시 발돋움 계기
인도 3위의 소프트웨어 업체 위프로와 약속이 돼 있어 시내에서 10km 정도 외곽에 위치한 호스르 가(街) 사무실을 찾았다. 홍보담당 아라빈드 씨는 먼저 위프로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지난해에 17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직원은 4만2000명에 이르며, 비즈니스 아웃소싱이 주 사업이라고 했다. 기초가 아주 탄탄하고, 가치를 지향하며, 직원의 능력과 창의력을 믿고 일을 맡기고, 원 스톱 솔루션으로 소비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게 위프로의 강점이라고 덧붙였다. ‘비즈니스 위크’지도 지난해 인도·중국 특집에서 위프로를 인도의 정보산업 혁명의 주인공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의 선두주자일 뿐 아니라 비즈니스 아웃소싱의 개척자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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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상낙원과 같은 위프로 본사 사옥. ② 위프로 아짐 프렘지 회장.
③ 방갈루루는 ‘인도의 실리콘밸리’라 불릴 정도로 최첨단 도시이나 코끼리가 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④ 커피 브레이크를 즐기는 위프로 본사 직원들.
신규인력 채용 방식에 대해 묻자 먼저 업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응모자를 받아 기술 적격 여부와 팀원들과의 조화, 의사소통·문제해결 능력, 그리고 과거 경력 등 세 가지 분야를 면밀하게 검토해 선발한다고 대답했다. 신분이나 출신 지역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의 IT 산업은 이제 시작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앞으로의 성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방갈루루 외곽에만 열 곳이 넘는 위프로 사무소가 있다면서 이 가운데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당연히 본사라고 답하자, 그는 택시(회사 소유 업무차량은 없고 모두 아웃소싱으로 조달한다고 했다)를 불러 6km 정도의 시골길을 달려 본사로 안내했다. 좁고 꼬불꼬불한 길은 곳곳이 파헤쳐져 있었고 먼지도 시도 때도 없이 날렸다. 그 위로 소달구지도 지나가고 헐벗은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길 주변에는 고층빌딩과 아파트 등이 들어서느라 복잡한데 전선줄마저 엉켜 있어 보기 사나웠다.
그러다 담이 쳐진 본사에 들어서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가 펼쳐졌다. 꽃과 수목이 자라는 정원을 가운데 두고 몇 개의 건물이 그 주위를 감싸고 있었는데, 건물은 3층 정도라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라빈드 씨는 아짐 프렘지 회장이 설립 당시부터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우리는 직원카페에 들러 차를 한잔 하고 커피 브레이크를 즐기는 직원들과 만난 뒤 수영장과 체력단련장, 휴게실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무실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보안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모습은 8km 정도 떨어진 ‘일렉트로닉스 시티’(위프로와 인포시스 등 많은 소프트웨어 업체가 입주해 있다)에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직원들에게 최고의 근무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보였다. 소프트웨어 산업은 제조업과 달리 상상력과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런 낙원은 지금은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이 점이 자꾸 커져 면(面)으로 바뀌면 인도 전체를 뒤덮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프렘지 회장의 저택은 건물 뒤에 있다고 했으나 울창한 수목이 가로막아 보이진 않았다. 그의 일정은 비서만 알 뿐이고, 언론 노출도 꺼려 베일에 싸인 인물로 유명했다(이 점에서 인포시스의 난단 닐레카니 회장과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내가 회장에 대해 궁금해하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들려주었다.
프렘지 회장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던 66년(21세), 조그만 식용유 회사를 운영하는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80년대에 들어서 컴퓨터 사업에 손댄 뒤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위프로를 세웠고, 이 회사가 인도 제3의 소프트 업체로 성장하면서 회사 주식 82%를 소유한 프렘지 회장은 인도 두 번째 갑부(개인재산 110억 달러)가 됐다는 것이다.
재산 110억 달러 프렘지 회장 검소한 생활로 유명
프렘지 회장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면서 전 세계 사무소에서 보내온 e메일 보고서를 읽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침 7시에 집무실로 출근해 스크램블 에그와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때운 다음 회의를 주재하고 그 이후 자기 일에 몰두한다고 했다. 퇴근은 오후 7시라 하루 14시간을 근무하는 셈이다. 프렘지 회장은 가정과 회사밖에 모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또 검소한 생활습관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갑부임에도 출장 갈 때는 꼭 이코노미석을 타며 호텔에 머물 때도 스위트룸을 사양한다는 것. 인도로 가는 기내에서 만난 IIT 출신의 선박 디자이너 크리슈난 씨가 인도의 지도자들은 “심플 라이프를 즐긴다”고 했는데, 듣고 보니 프렘지 회장이야말로 그 전형이라 할 만했다. 프렘지 회장은 탁월함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탁월함이란 잠재적인 능력과 끼를 발휘해 최고의 것을 창출하는 용기와 노력을 뜻한다고 했다. 이는 내면적인 성숙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직원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쏟아 붓고 그 대가로 돈을 벌고 있으나 그 돈을 개인적인 사치나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 쓰려고 하는 프렘지 회장. 그를 생각하자 인도의 앞날이 더욱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그를 두고 세계 언론은 ‘IT 차르(황제)’ 또는 ‘기술 왕(Tech K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인도는 가장 인도다운 방식으로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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